1997. 6. 『현대사상』 2, 민음사


<현대사상> 연속기획

<오늘의 지성을 찾아서: 김현 편>

한국철학, 법고창신의 프론티어


  대담자: 김현(한국데이터시스템 상무이사, 한국철학)

          이동철(용인대, 중국철학)

  대담 일시: 1997년 4월 11일 

  대담 장소: 민음사 회의실 


<편집자의 말>

김현은 <고전은 전산화만이 그 위상을 올바로 자리매김한다>라고 얘기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첨단에 서 있는 사람답지 않게 견고한 보수적인 인간이다. 동양의 수많은 고전들이 현대에 와서도 여전히 인간과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 된다고 믿고 있는 선비 정신을 갖고 있다는 면에서 그렇다. 하지만 학자와 학자, 장사꾼과 장사꾼만이 이야기가 통할 것이라는 완고한 상식의 틀을 깨고 그 경계선을 넘나들며, 현대의 학문은 다시 인간으로 종합, 귀결되는 인간학만이 진정한 과학이라고 주장하는 통합주의자다.

그런 면에서 그는 아이디얼리스트이다. 어지러운 말을 많이 하는 외로운 이데올로기스트나 냉혹한 현실주의자만이 별종이라는 듯 시선 집중을 받고 있는 현실에서 한국 사상사를 공부하고 KIST에서 시스템 공학을 연구한 김현의 고전과 테크놀러지를 결합하려는 시도와 그 성공적인 결과는 아이디얼리스트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천 권의 장서와 몇 장의 CD-ROM 중에서 으레 천 권의 장서를 택하는 대학 도서관과 학자들 앞에서 김현은 맥이 빠진다. 학문과 정보의 생산자들이며 축적된 가치와 효용성을 가르쳐야 할 학자와 연구자들이 그의 노력을 외면하는 가운데 오히려 상업적인 출판인들과 방송, 언론인들이 먼저 알고있지 않은가! 요즘 쏟아져 나오는 조선왕조 관련 책들과 보학(譜學)연구와 역사추리 ,역사여행류의 TV프로그램들이 웅변하고 있다시피 그의 작업이 파생시킨 성과물(?)들을 보면 알 수 있다. 김현은 언젠가 이런 말을 했다. 적어도 2000년까지는 어떤 나라에서도 단일 프로젝트로 이만한 작업은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그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는 왜 이런 방대한 작업을 했을까. 조선왕조 실록의 전산화에 들어간 방대한 비용으로 본다면, 그 결과로 얻어진 수익은 어이없을 정도로 미미하다고 한다. 적어도 장사꾼이라면 치밀한 시장조사와 판매 방법을 세운 후에 시작했어야 했다. 그러나 산술적인 계산이 아닌 사회적으로, 학술적으로 축적될 가치로 환산한다면 실패했다는 말은 아직 이르다. 규장각과 서원에 잠들어 있는 수많은 한국학 전적(典籍)들과 동양의 고전들이 김현의 작업을 개기로 치밀하게 재구성되어 우리 앞에 온전하게 현재화되고, 컴퓨토피아(이렇게 말해도 될까?)를 두려운 <검은 신화>로 보고 있는 고전 학자들과 나아가 모든 이들에게 정보화에 효용성을 인식시키게 된다면 말이다.

우리가 김현의 작업을 주목하는 까닭은 <조선왕조실록>의 전산화에서 유래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점점 더 알 듯 모를 듯한 관념의 영역으로 확장되어 가거나 더욱더 미시의 세계로만 나가는 현재의 인문 사회과학에 대하여, 낡은 것에 새옷을 입히고 실체를 오롯하게 구현하고 다시금 그 결과를 비판하는 지식인의 본원적 기능을 새로운 공간에서 수행하는 학자를 만나기 때문이다. 자칭 장사꾼이라는 그가 장사꾼으로 불리고 싶건 아니면 학자로 불리고 싶건 그건 그가 규정할 바가 아니다.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은 건 김현이고 가치 평가는 언제나 그 외의 모든 사람의 권리이기 때문이다.

학자이면서 학계에 있지 않고 장사꾼이면서도 산술적이지 못한 그는 새로운 작업을 모색하고 있다. 영국과 미국에 머물며 고전과 테크닉의 결합을 시도하는 이방인들과 만날 예정이라고 한다. 이제 그와는 다른 공간에서 다른 방법으로 고군분투하고 있는 또다른 <김현들>에게는 지적 공간에 참여할 기회가 있음을 알리고, 정보화에 사회에 대한 일말의 불신을 가지고 있는 한국의 고전 학자들에게는 그의 작업이 필요 조건이라는 인식을 일깨우기 위하여 이번 호 <오늘의 지성을 찾아서>는 어렵게나마 학문과 시장의 사잇길을 가로질러 걷겠다는 김현을 소개한다. 


<대담>


이동철 안녕하십니까. 원래 당신과는 대학시절부터 친구로 지냈지만 막상 이렇게 공식적인 자리에서 만나니 쑥쓰러운 점도 없지는 않군요. 하지만 바로 그 친구 관계라는 사실을 <현대사상> 쪽에서 주목해 저를 당신과의 대담 상대자로 이 자리에 앉힌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만큼 당신을 잘 알고 있다고 판단을 했을 터입니다. 어차피 주어진 자리고 또 오늘 이 자리가 단순한 친구의 만남이 아니라 한국 지성의 새 장을 모색하는 뜻도 있으니만큼 저도 어느 정도는 공식적인 입장을 갖고서 대담을 이끌어가 볼 작정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미리 부담을 갖지는 마시고 자유롭게 옛날 이야기하듯이 대화를 나누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김현 <오늘의 지성을 찾아서>코너에 저를 초대하겠다는 김성기 씨의 제안을 받고서 처음에는 다소 당혹감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창간호의 내용을 살펴보면서도 제가 이러한 대담에 적절한 인물은 아니라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물론 나름대로 제가 하는 일에 대해서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고 또 자부심도 있지만 그러한 제 작업이 지식인이나 지성인의 역할이라고 생각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오히려 적절한 표현을 찾는다면 전문가라고나 할까요. 전문가로서, 전문적인 영역에서 제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이고 사실상 이러한 대담 같은 것도 그러한 전문가를 찾아서 하는 탐방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지성인의 역할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뚜렷한 자기 견해 또는 사상을 가지고 사회에 일정 정도 영향을 미친다든가 사회를 어떠한 방향으로 이끌어 나가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저는 아직 그러한 역할을 자임할 만큼 성숙되어 있지 않은 형편입니다. 이 말은 단지 겸손이 아니라 솔직한 제 판단입니다.


이동철 그런데 ≪현대사상≫에서는 그런 전문가로서의 면모마저도 현대 지성이 나아갈 하나의 길로 보고 있으며, 이번 대담에서는 바로 이 점에 초점을 맞추고자 하는 것입니다. 저간에 지성이라고 하면, 현실로부터 떨어져서 다소 추상적이고 일반론적인 이야기를 하는 사람, 또는 좀 거칠게 말하면 어떤 특정한 권위를 가지고 거대한 청사진을 구상하는 사람으로 국한되기 십상이었죠. 유교 전통에서 비롯한 것은 아닌가 하는데, 아무튼 그런 지성의 모델은 우리 세대에서는 더 이상 적실하지 않으며 요즘 사회과학이나 인문과학의 지적 위상이 실추되는 것도 그와 연관되는 면이 크지 않은가 하고 판단도 하게됩니다. 물론 공리주의로 치닫는 시대 상황의 불리함이 더 큰 원인이 되겠으나 현실에 개입하는 내적 역량에서 전문적인 능력의 부재 같은 면도 간과할 수 없겠지요.


김현 어찌 보면 지성이라는 용어에 대한 의미파괴 운동을 실천하는 건데...


이동철 그렇죠. 우리가 지금까지 선험적으로 생각했던 지성이라는 것이 80년대까지는 우리 사회에서 상당히 유효했을지도 모르지만 90년대 이후에 지성인이라고 하는 것이 상당히 약화되었다고 느껴지며, 그러던 차에 당신과의 대담을 요청받았던 것입니다. 아까 말했던 전문가로서의 당신 입장이 현대 지성의 새로운 진로랄까 대안의 하나로서 주목할 만한 시점은 아닌가 하는 것이지요. 당신이 한편으로는 인문학, 좁혀 말하면 한국사상사 내지 한국철학을 전공으로 하는 연구자입니다만 다른 한편으로는 현재 정보사회에서의 첨단 현장에서 활동하면서 왕조실록의 CD-ROM을 개발하고 여러 가지 데이터베이스 구축을 하는 등 상당히 구체적인 결과를 내왔을 때 이것은 우리가 통념적으로 이해했던 지성인도 아니고 또 역으로 통념적인 수준의 전문가도 아닐 것이라는 생각도 하게 되거든요. 그런 면에서 볼 때 나름대로의 여러 갈등도 꽤 있었을 터이고 또 어째서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걸었는지 상당히 궁금합니다. 그래서 그런 이야기를 들어본다는 것 자체가 현대적 지성상을 새롭게 추구하는 길의 하나가 될 수 있겠다, 뭐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서 대담 요청을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철학 연구자거나 컴퓨터 전문가였던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결국 살아가면서 자기의 길을 선택하는데 먼저 남다른 특별한 길을 선택했을 때까지의 과정이랄까 다시 말해 본인의 경력이라든가 그 과정에서 겪었던 경험과 생각들을 한번 듣고 싶습니다.


김현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제 명함을 받는 분들이 의아하게 생각을 하고 어떻게 철학을 전공한 사람이 컴퓨터 같은 것을 하느냐 하는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어떤 때는 머리를 짜내어 간략하게 답변하기도 하고 때로는 이야기가 길어질까봐 설명을 피하기도 합니다. 어쨌거나, 저의 전공은 분명 한국철학입니다.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고 대학원 과정에서 한국철학을 주제로 하는 논문을 썼구요, 또 오랫동안 한국 철학사, 성리학에 관한 강의를 해왔습니다. 하지만 제가 사회적으로 좀더 많은 활동을 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고전 자료를 데이터베이스화하여 온라인에 공개하고 CD-ROM으로 만드는 일들입니다. 그러한 두 가지 일, 사람들이 흔히 두 가지 일이라고 말하는 그 작업이 내 자신의 관점에서 봤을 때는 바로 우리의 전통문화나 고전을 소재로 해서 정보화한다는 한가지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일에 관계하게 된 계기는, 제가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는 과정 중에 공부 시간의 대부분을 고전 문헌을 읽고 그것을 해석하는 데에 바쳤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저로 하여금 이러한 고전 연구에서 연구 생산성의 향상이라는 문제에 눈을 뜨게 했고 또 컴퓨터라고 하는 것을 그 도구로 사용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했던 것입니다.


이동철 내가 알기로는 고등학교때 상당히 우수한 성적이었고 고려대학교에도 특차로 입학을 했었죠, 그것도 특차 수석으로 말입니다. (웃음) 개인적으로 늘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이, 예비고사나 요즘 수능시험에서 특차로 입학한 우수한 학생들의 경우 인문계쪽은 다 법대를 가서 사회 정의를 실현하고 이공계쪽은 대부분 의대를 가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헌신하겠다, 이런 식으로 말하는데 우리 사회에서 정의 복지의 구현은 아직도 요원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당신은 상당히 예외적이라고 할 수 있죠. 그렇게 우수한 성적을 가지고서도 특별히 철학과를 지원했다면, 일찍부터 동기가 있었을 것 같은데 그 점에 관해 듣고 싶네요.


김현 가정 환경의 영향이겠죠. 상당히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자랐습니다. 나는 철학을 하지만 동생은 조각 전공이예요. 부모님께서 연년생으로 형제를 두셨는데 둘 다 돈버는 일하고는 무관합니다. 물론 나는 돈버는 일에도 종사하지만 전공으로 볼 때는 무관한 것을 택했고 그 과정에서 사실 부모님으로부터 많은 격려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철학을 전공하겠다고 선택한 것은 물론 대학 입학할 즈음이라든가 대학에 들어와서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오래 전, 아마도 중학 시절에 장래 희망을 조사할 때 철학을 공부하겠다고 손들고 말하지 않았나 생각이 되는데 여러 가지 계기가 있었겠죠.


이동철 부모님께서도 문학을 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간단히 소개해 주시죠.


김현 오래전 일이기는 합니다만 저희 아버님께서 수필문학지 간행을 문학운동 차원에서 전개하셨습니다. 저희 아버님께서 발행인이 되시고 어머님이 주간으로서 ≪수필문학≫이란 잡지를 하셨습니다. 10년이 넘는 오랜 기간 동안 그 출판을 담당했던 관동출판사가 바로 저희 집이었습니다.


이동철 아! 당시 국어참고서로 유명했던 그 관동출판사입니까?


김현 어머님과 아버님이 다 고등학교 국어 교사를 하셨거든요. 그래서 아버님께서 국어 참고서를 내면서 출판사를 하나 만드셨고, 그 출판사가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자 ≪수필문학≫이라는 잡지를 창간해 수필 문학 운동을 일으키셨던 겁니다. 두 분이 그렇게 일을 하시고, 더군다나 출판사가 우리집에 붙어 있었기 때문에 저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 쭉 자라났죠. 많은 문인들이 와서 서로 대화를 나누고 글들을 발표하던 그런 기억도 있습니다. 그때 부모님들은 수필이라는 장르를 서양의 에세이나 미셀러니 등의 종류로 볼 것이 아니라, 동양의 전통적인 산문이라는 것이 있는 데 바로 그것이 우리 수필 문학의 모태가 되어야 된다는 생각을 갖고 계셨지요.


이동철 전통적으로는 가학이라고 해서 그 집안이 얼마큼 학문을 하느냐 하는 것도 중시하는데 당신이 전공한 녹문(鹿門) 임성주(任聖周)의 경우도 그런 맥락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철학을 전공하고 그런 과정에서도 고전어, 한문의 세계에 몰두하고 심취했던 것은 부모님의 영향이라고 봐도 무방합니까?


김현 예.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관심을 좀 더 역동적으로 만들었던 것은 두 분의 전통에 대한 관심이 항상 의견 일치를 보는 것이 아니라 갈등했다는 사실 때문이었지요. 어머니는 초창기에 기독교를 받아들인 집안에서 자라났기에 아주 독실한 크리스천입니다. 하지만 아버님은 상당히 유교적인 전통을 계승해 온 집안 출신이고 더군다나 그 전통이 젊은 시절 월남을 통해 단절되면서 향수가 더욱 강해졌어요. 유교 전통을 보존하고 되살려야겠다는 믿음을 굳게 가진 분이셨습니다. 이런 기독교 문화와 유교 문화의 긴장, 그것을 명확하게 개념화시켜서 자각하진 못했었습니다만 한편으로는 문화적인 분위기, 그러면서도 팽팽한 긴장감, 이러한 것이 저로 하여금 철학의 세계에 관심을 갖게 만드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동철 그것은 당신의 개인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가 어떤 면에서 보면 19세기 말과 20세기 이래 기독교를 포함한 서구 문화가 들어온 후, 아직까지도 전통 문화와 적절하게 융화되거나 조화를 못이룬 채 잠재적으로 많은 갈등의 요인을 안고 있는 상황이기도 하죠. 당신은 그런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왔는지가 궁금합니다. 대학을 다닐 때의 기억으로는 상당히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것 같은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요컨대 지금도 열심히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지 아니면 출석하지는 않더라도 내면적으로는 그 가치를 인정하고 있는지.


김현 대학 입학 이후 근 20년이 지났는데 요즈음의 제 생활을 말씀드린다면, 전처럼 그렇게 독실한 크리스천은 아닙니다. 특별한 행사, 예컨대 부활절이라든가 크리스마스, 추수감사절이 되면 그래도 교회에 완전히 발을 끊을 수 없기에 집 근처에 있는 교회에 나가기는 합니다. 일종의 타성이라고 보아도 좋습니다. 그리고 요즈음 저는 기독교를 현대 한국 사상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라고 보고 있습니다. 즉 한국 사상이라는 것이 일정한 형태가 있어서 그것이 삼국시대때부터 오늘날까지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의 많은 다른 요소들이 첨가되어서 끊임없이 자라나오는 것이라고 보고 있는데, 우리나라가 과거에 고대 국가를 형성할 때 불교라는 요소를 받아들여 한국 사상의 일부로 삼고, 그 뒤에는 유교를,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성리학이라는 요소를 받아들여서 한국 사상의 부피와 깊이를 좀더 크게 했다고 한다면, 그것이 오늘날에는 서구 의회민주주의, 그리고 기독교라는 것을 우리 사유의 일부로 받아들여서 한국 사상이라는 커다란 실체를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동철 그처럼 개방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로 한국 사상사를 이해하는 자세가 남들이 보기엔 전혀 별개의 영역이였던 것, 예로 컴퓨터나 전산화조차도 구체적인 방법론의 일환으로써 포용한 점과도 어떻게 보면 맥이 닿는다고도 봅니다. 그런 것은 논리의 문제라기보다 삶에 대한 태도의 문제일 수 있으니까요. .


김현 그러면, 상당히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를 이해해주는 것이지요.


이동철 저로서는 사실은 그런 문제가 상당히 중요하다고 봅니다. 나도 전통쪽의 가치를 중시하는 편입니다만 서구적인 것과의 관계 때문에, 예컨대 동양학과 서양학, 동양 철학과 서양 철학을 구분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것인지, 혹 이른바 자리싸움이나 땅싸움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동양에 속하더라도 서양의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우리의 현실과 현장에 맞는 보편성을 가져오느냐를 고민합니다. 또 반대쪽에서도 마찬가지겠죠. 여태까지 우리 사회에서 주류을 차지했던 서구의 학문을 하는 분들도 역시 우리 전통의 유산을 얼마나 적극적으로 소화할 수 있느냐, 자기 것으로 만들어 나갈 수 있느냐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같이 해야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김현 이런 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당신은 기독교와 유교, 또는 동양 철학과 서양 철학 사이에서 적대적이고 대립적인 면이 아니라 융합이 되는 측면을 말했지만, 저는 오늘날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유교 윤리나 가치가 크리스천 사회에 가장 잘 보존되어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물론 그들이 의식적으로 그것을 신봉하고 전통의 제사 절차를 지키지는 않습니다만, 전체적으로 우리 사회에서 유교적 가치관과 그 윤리가 잊혀져 가고 있는데 크리스천은 그런 윤리 규범의 신성성을 그대로 지키는 사람이라는 것. 또한 알게모르게 그들이 신봉하는 그러한 윤리 규범이라는 것이 순수하게 기독교적인 것이 아니라 전통적으로 우리 사회에서 미풍양속으로 인정되어 오던 윤리 내지 유교 윤리적인 모습을 많이 띠고 있다는 것이죠. 그들은 가족 관계의 윤리 같은 것을 기독교 율법의 준수라고 자연스럽게 생각할지 몰라도, 그들이 생활하고 있는 사회가 우리 사회이며 그들 또한 가문의 뿌리라든가 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유교화된 크리스천이라고 할까요, 아니면 기독교의 토착화 내지 유교화라고 할까요, 아무튼 이런 식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동철 우리나라에 들어왔던 개신교가 서구에서도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전통 회귀론이든 복음주의든 보수적 성향이 강한 흐름에 영향을 받았다는 점도 한 가지 원인이겠지만, 반면 지금 지적 한 대로 기독교의 방식이나 그 추구 자체가 어떻게 보면 전통적 가치와 상당히 닿아 있는 것이기도 하죠. 이것은 우리 사회에서도 서구적인 문물을 많이 받아들이고 과학을 전공했다든지, 유학을 갔다 왔다든지 하는 분들에서도 개인적 삶이라든지 집안 문제에 대해서, 달리 말해 수신제가(修身齊家)의 문제에 있어서는 의외로 유교적인 케이스가 많이 눈에 띄거든요. 좋다 나쁘다를 떠나서 현상적으로 존재하는 한, 방금 당신의 지적은 퍽 흥미롭습니다.

  이제 논의 방향을 좀 바꿔보도록 하죠. 대학에서 과연 어떻게 생활했느냐 하는 것이 궁금하기도 한데 동양 철학을 하면서 한문 공부에 상당한 시간을 투자했다고 했는데 그 대목을 구체적으로 듣고 싶군요. 또 졸업하고서 컴퓨터의 세계에 입문하게 된 과정도 이야기 해보면 좋을 듯싶습니다.


김현 사실, 컴퓨터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대학 때부터입니다. 당신도 아는 이야기이지만 대학 시절 내 생활의 대부분은 한문 공부를 하는 데에 바쳤습니다. 매일 저녁, 친구들과 모여서 경서(經書), 다시 말해 대학, 논어, 맹자 같은 사서(四書)를 읽는 시간을 가졌고 여름 방학, 겨울 방학 동안은 줄곧 자치통감(資治通鑑)이나 고문진보(古文眞寶), 고문관지(古文觀止), 사기(史記) 같은 책을 독해하면서 지냈죠. 학기중에는 주로 경전을 읽고 여름에는 문학서를 읽고 겨울에는 역사서를 읽는다는 나름대로의 커리큘럼을 만들어서 4년동안 공부했습니다. 그때 그렇게 한문을 해석하고 거기에 담긴 의미를 즐기는 정취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동철 그 당시 나는 당신과 함께 동수회(東修會)라는 서클에서 한문 공부를 했는데, 일학년 겨울 방학부터 시작한 나와는 달리 당신은 입학하자마자, 3월 1일인가요 2일인가에 나왔다고 선배들이 늘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흔히들 입학 초라면 미팅이나 노는 모임에 관심이 많은데, 그 동기나 과정이 궁금합니다.


김현 지금 생각해보면 일종의 치기였을 수도 있겠는데 어쨌든 그때는 아주 절실했습니다.

  동양이라는 것, 전통이라는 것에 대해 가급적이면 빨리 그 실체를 알아야겠고 그것을 알 수 있는 역량을 확보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던 거죠. 흔히들 대학에 처음 들어가면 대학 시절 동안 매우 많은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또 그래야 한다는 각오들을 하지 않습니까? 지나서 보게 되면 그러한 의지를 가지고 치열하게 노력한 면, 그것이 중요하기도 하고 그렇게 했기 때문에 뭔가가 남았겠습니다만, 그렇게 시작했던 일이 치열함보다는 즐거움을 주었으며 또 거기서 만나는 사람들과 나눈 대화들이 즐거웠기 때문에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이겠죠.

  그 과정에서 제가 느꼈던 것 한가지만 이야기한다면 이런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좌절이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 우리가 읽어야 할, 섭렵해야 할 고전 문헌의 양이 너무도 방대하다는 것, 우리 옛조상들이라면 우리보다도 훨씬 더 어린 시절부터, 유아기 때부터 천자문(千字文)을 공부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한문 능력을 키워왔고 또 그들의 시대에는 고전을 읽는 것 이외에 달리 대안이 없었기 때문에 거기에 전념해서 다수의 저작을 남기고 심화된 연구도 하고 그럴 수 있었겠습니다만, 오늘날 우리가 현대적인 학문 방법론을 도입하고 사회과학이나 자연과학에 관심을 가지면서 옛날 사람과 같은 고전 독해력을 가지고 많은 고전을 읽고 섭렵한다는 건 사실 거의 불가능에 가깝죠. 그점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인가. 현대 사회에서 동양학, 동양 고전을 공부할 때 연구방법론을 어떻게 정립해야 할 것인가. 이런 식의 질문이 당시 나에게는 아주 현실적인 문제로 다가왔습니다.


이동철 그런 문제 의식이 아까도 언뜻 언급했지만 이미 대학교 시절에 지녔던 컴퓨터에 대한 관심과 맞물려서 본인의 현재를 만들었던 것이겠지요. 


김현 예. 그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다음 제가 대학원, 정신문화연구원 부설 한국학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쳤었는데 그때의 경험이 또 한번의 계기를 이루었습니다. 당시 정신문화연구원에서는 미국에서 학술 정보를 전산화한 데이터 베이스를 이용해서 정보를 취득하고 논문쓰는 과정에서 도움을 받은 몇몇 연구자들이 정신문화연구원과 관계를 맺으면서 정신문화연구원이 이러한 방향의 전산화 사업을 추진해야 된다는 제안서를 내기도 했습니다.


이동철 그 당시는 대략 82-83년도의 이야기가 되겠죠. 고려대 철학과에서 정신문화연구원의 대학원에 진학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커다란 모험이기도 할 터인데, 그 동기랄까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김현 그때 정신문화연구원 대학원의 이름은 <한국학 대학원>이었습니다. 한국학 진흥을 목표로 설립된 대학원이었기 때문에 한국 철학이나 역사를 전공한 학생들에게는 좋은 기회로 간주되었죠. 정신문화연구원에서 그러한 교육기관을 만들고 한 것은, 유신 이념, 한국적 민주주의 등으로 나타나기도 했던 박 대통령 자신의 반미 성향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다른 한편 일제 식민지와 6․25를 겪고서 경제적으로 피폐해진 상황에서는 우리 것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지만 어느 정도 여유를 되찾고 사회적으로 우리 것에 대한 인식이 일어나기 시작했을 때 한국적인 문화를 이룩하자고 하는 캐치 프레이즈를 내걸고 유신 말기에 박 대통령이 북한의 사회과학원을 모델로 삼아 정신문화연구원 같은 조직도 만들고 한 거죠. 냉정하게 생각해서 보면 그 당시, 우리 세대 70년대 후반, 그때에 한국학을 하겠다, 전통 문화를 공부하겠다고 생각하고 그쪽 분야로 전공을 잡은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분위기에 영향을 받은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이동철 심하게 말하면 편승일 수도 있겠고 어쨌거나 많은 면에서 그런 바람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김현 만일 그때, 사회적으로 그러한 분위기 조장이 없었다고 한다면 한국학이라는 것에 대해서 자발적으로 관심을 가질 인구가 그렇게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정신문화연구원 시절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면, 전산화 사업을 세우고 거기에 네트워크와 주전산기를 가진 키스트(KIST)처럼 컴퓨터를 쓸 수 있는 통신망과 단말기를 설치하는 작업을 정신문화연구원에서 추진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런 기술적인 고려가 없었으며, 컴퓨터라는 것이 대단히 문화 의존적이라는 인식도 미흡했지요. 냉장고나 세탁기 같은 것은 미국에서 쓰든 영국에서 쓰든 그냥 그 기능을 하는 물건인 반면 컴퓨터 세계는 지식을 다루는 기계이고 언어를 다루는 기계거든요. 따라서 그 문화에 적응을 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단지 기계만 구입한다고 해서 전산화되는 것이 아닌데 유감스럽게도 그 사업을 제안했던 사람이나 그 제안을 받았던 사람이나 그 같은 사실에 대한 이해가 없이 무조건 미국의 앞선 대학 사회에서 이렇게 하니까, 우리나라에서도 이제 연구 생산성의 향상을 위해 그러한 일을 해야 한다는 막연한 인식을 갖고서 그러한 작업에 착수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실패할 수밖에 없었죠. 나로서는 대학원 과정에서 전공 공부를 하는 와중에서나마 그러한 사태의 전말을 옆에서 보고 많은 문제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동철 어떤 면에서는 그 당시의 문제점이 오늘날에도 완전히 해결되었다고 보기 힘들죠. 정보화라고 하면 여전히 지나치게 하드웨어 중심적이랄까요. 아마 그런 문제점을 초기에서부터 보았기 때문에 당신의 경우 정보화 과정에서 인문학적인 베이스, 바꿔 말하면 기본적이고 문화적인 측면을 상당히 중시하는 것이며 또한 그런 경험이 오늘날 인문학과 전산학, 또는 고전과 현재를 접맥시키는 작업을 본인이 진행하는 일과도 연결시키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죠.


김현 정신문화연구원에서의 경험을 계속 이야기할까요. 거기에서 느꼈던 문제의식 자체는 우리가 대학에서 한문 공부를 하면서 부딪친 것과 거의 흡사합니다. 방대한 문헌과 고전들을 개인 연구자 저마다 거듭 되풀이 독해한다는 일 말입니다. 분명히 이 한편의 글을 누군가가 읽었고 또 읽는 사람이 한두 사람이 아닌데 그것을 우리는 또다시 읽어야 됩니다. 퇴계의 유명한 저작 같은 경우는 번역서가 나와 있다거나 깊이 있는 연구가 있을 경우에는 그것을 바로 참조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주자대전(朱子大全)이나 주자어류(朱子語類)에 나오는 많은 문구들에 대해 누군가는 아주 깊이 있게 연구하여 피상적인 해석이 아닌 진면목을 파악했더라도 그것이 다른 연구자들에게 전달될 기회가 거의 없습니다. 우리가 연구 결과를 표현하는 수단으로 삼는 논문이란 것은 나름대로 자기가 정한 주제, 서술 방법 때문에 아무리 많은 공부와 독서 그리고 고민을 했다 하더라도 일부만의 맥락을 세워서 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 사람의 노트에 기록된 많은 지적 고민의 자취들이 공유되지 못합니다. 물론 그러한 훈련은 남들이 했다고 해서 생략하는 것 아니라 스스로 똑같은 노력을 기울이고 고민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 양이 너무 과도하여 결국은 동양학을 하는 사람들이 생산적인 새로운 의견의 창출, 새로운 사상의 정립에 대한 여유를 얻지 못하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을 많이 해보거든요.


이동철 미이라를 잡으러 갔다가 미이라가 되었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납니다. 그런 것은 번역의 문제라거나 학문적 기반의 정립하고 연결이 되겠지요. 구체적인 공부 과정도 중요하지만 거기에 행해지는 절차, 예컨대 원전에 대한 주석과 번역이 정확하게 정립되고 그 가치를 검증하며 활용하는 관례가 만들어진다면 우리가 훨씬 더 공부를 쉽고 편하게 하게 될 것입니다. 나아가 그 관례나 방법론의 확립이 연구의 생산성이라는 면에서도 한 해에 논문이 몇 편이 나오느냐 식의 수량적 기준보다 더욱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는 동양학이건 서양학이건 마찬가지 고민인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우리나라 학계의 전반적인 과제이기도 하겠지요.


김현 한편으로 한문 번역에서는 문제가 더욱 심각한 것 같아요. 외국어로 인한 언어의 장벽이라는 것은 공간적인 장벽입니다. 예컨대 독일 사회와 프랑스 사회, 우리 사회처럼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는 각 사회 사이에 장벽이 있다는 문제이지만, 한문과 우리 사이에 놓여 있는 장벽은 시간적인 것입니다. 어느 면 더 넘기 어렵고 좀더 기만적일 수도 있는 장벽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현대 학문에서 공간적인 장벽의 경우 어쨌건 동시대에 더 나은 답, 정답에 좀더 가까운 접근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한문의 장벽은, 예컨대 타임 머신을 타고 조선 시대나 송나라 내지 한나라로 갈 수가 없는 한 참으로 극복이 어려운 것이예요. 그래서 그것은 극복이 어렵지만 한편으로는 정답의 모범적인 준거를 찾기가 어렵기 때문에 적나라하게 자신이 번역에 이르기까지의 자취를 보여주지 않는다면 그리고 이를 은폐시키고 감출 때, 그것은 참 성공적으로(?) 은폐시키기 쉬운 거죠. 더군다나 읽어야할 문헌의 양은 많고 관심은 조각조각나 있어서 한 방면의 전공자들이 관심을 공유하는 상대 연구자를 대여섯 명 이상 만나기 어렵다면, 고전을 공부한다고 하는 것은 그냥 자기가 닫힌 울타리 안에서 안주하는 자기만족이 되기 쉽습니다.


이동철 그래서 자기가 울타리를 치고 나서 여기가 내 땅이라고 내세우기도 하죠. 또한 사실 공동의 논의가 전개되는 일이 없다는 것도 상당히 큰 문제입니다. 이제는 많이 달라졌지만, 어떤 때 는 학회에 나가 보아도, 다른 발표자가 어떤 원전을 읽고 나서 이렇게 생각한다고 했을 때 그에 대한 활발한 토론이 안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거든요. 문제는 그 원전을 같이 읽어 봤어야죠. 설사 읽어 보았더라도 이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할 때 내 입장과 그 사람의 입장 사이를 매개해 줄 수 있는 공동의 기반, 예를 들어 서양 철학이나 다른 분야에서는 그 준거라거나 척도가 남의 것에 의한 것이라도 일정하게 만들어져 있는데 우리에게는 그런 준거가 없는 점이 상당한 장애물로 작용합니다.


김현 우리가 종사하는 작업은 지금 그 척도나 기준을 만들기 위해 단절된 자원들을 다시 발굴하고 드러내는 거기에 머무르는 세대인지도 모르지요. 다른 한편으로는 당신이 말했듯이 기존에 만들어진 척도나 기준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정말 절실히 필요한 그러한 문제를 다루어 나갈 수 있는 지도를 설계하는 일부터 과제로 주어져 있으니까 좀더 할 일이 많은 세대라는 자의식을 가져볼 만도 하지요.


이동철 어떻습니까? 예컨대 잘 알려진 「조선왕조실록」의 CD를 개발했을 때도 그런 문제들에 부딪쳤을 터인데요. 오늘 대담의 의도 중 하나도 아마 컴퓨터의 전문가이면서 전통 철학 연구의 전문가이기도 한 사람으로서 양쪽에서 느끼는 우리 사회의 문제점, 그리고 이에 대한 해결책 또는 대안에 대한 생각을 들어 보고자 하는 데 있지 않을까 합니다. 어떻게 보면 문제점의 중요한 원인에는 일면적이고 피상적인 이해도 있을 것입니다.


김 현 현대 많은 이들이 시간이 갈수록 자료들이 정보화되며 컴퓨터를 통해서 정보 이용의 효용성을 극대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많은 이들이 생각합니다. 하지만, 나는 솔직히 정반대의 생각을 하고 있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어떠한 분야의 지적 자원들은 점점 더 정보화되기 어려울 것이고 그리고 그 정보화의 범위 속에서 완전히 제외될 것입니다. 이른바 부익부 빈익빈이라고 하는 이야기가 바로 여기에 적용될 수 있다고 할 수가 있는데요, 전산화의 큰 특징 중 하나는 그 방면에 대한 노력을 기울이면 기울일수록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 노력이 집중적으로 투여될 때에 한정되는 이야기고 전혀 새로운 분야를 새로 시작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자본과 기술이 필요로 합니다. 일반인들의 수요가 많은 인기 있는 분야들, 엔터테인먼트라든가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유아 교육, 청소년 교육과 관련된 분야, 이런 쪽은 수요가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투자를 하고 그 투자가 이루어져서 기술 개발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기술의 개선, 추가 개발이 용이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쪽은 좀더 풍부하게 발전해 나갈 것입니다. 하지만 수요가 없기 때문에 처음서부터 배제되었던 분야들은 시간이 갈수록 새로운 투자가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이죠.


이동철 그 격차가 점점 더 커진다는 이야기죠.


김현 제가 어떻게 보게 되면, 결사적으로 동양 고전의 전산화에 매달린 이유는 바로 그러한 점에서 어떤 위기 의식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우리가 우리 생각을 전하고 남이 개발한 그런 생각을 얻는 방법은 종래의 책과 같은 올드미디어에서 컴퓨터 통신망이라고 하는 뉴미디어로 급속하게 바뀌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어떤 인위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러한 새 매체에서 우리의 소중한 지적 자원이 소외될지도 모른다는, 그래서 우리의 후배들은 통신망이라는, 컴퓨터 네트워크라는 매체 속에서 우리의 전통이나 고전 텍스트를 접할 기회를 완전히 박탈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저로 하여금 절박하게 이러한 일에 매달리게 하는 이유라고 할 수 있죠.


이동철 지금까지 우리는 컴퓨터나 뉴미디어 또는 여러 가지 네트워크 등을 전통 학문이나 인문학과 관련해서 어떻게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느냐 하는 측면에서 많이 이야기하였습니다. 뒤집어서 보면, 한국 철학이라는 것도 철학의 한 분야이니까 그 철학을 하는 사람으로써 뉴미디어라든지 아니면 인터넷과 같은 것 자체도 철학의 대상이며, 그것이 갖고 있는 어떤 철학적인 함의를 다루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중간에서도 말했습니다만 이제는 동양 철학을 하는 사람이니까 무엇무엇만을 다루어야 된다든지 하는 구분 없이 보편적인 학문을 해야 되지 않을까? 이런 문제에 대해서도 한국 철학을 하며 컴퓨터 전문가라고 하는 본인의 입장에서 봤을 때 느껴지는 어떤 철학적 함의라고 할까요? 그런 것에 대해서 좀 듣고 싶군요

쉽게 말하면 현대 사상에서 먼저 다루었습니다만 버튜얼 리얼리티라거나 사이버 소사이어티가 갖고 있는 의의입니다. 그것은 아마 동양 철학, 서양 철학을 떠나서 당장 우리 자신의 문제이고 우리 후손의 문제이면서 많은 것이 연결되어 있는 것인데 진지하게 이야기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거든요.


김현 아마 요즘에는 인문학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컴퓨터 특히 인터넷과 같은 주요한 정보통신 환경에 관한 논의들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논의의 수준이라고 하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의사 소통의 수단으로서 인터넷을 적극 활용하자는 정도인 듯합니다..


이동철 도구적 역할에만 주목하는 것이죠. 아직까지는……


김현 자기가 자기 생각을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알리고 남들이 하는 생각, 그리고 그들이 이루어 낸 최근의 업적들을 좀더 빨리, 좀더 체계적으로 입수할 수 있는 하나의 도구로서 인터넷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자는 것이며, 거기서도 활발하게 의사소통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저는 사실 상당히 반가운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것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인터넷이라고 하는 것이 의사소통의 도구적 역할로써만 쓰여지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으로 대변되는 사이버의 세계가 바로 우리가 철학을 해야 하는 또 하나의 현장, 철학의 대상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이 사이버의 세계는 단지 컴퓨터와 전화 통신망만 존재하는 차가운 기계적인 세계가 아니라 그 속에서의 정보 교류의 방법, 그리고 그러한 정보 문화를 서포트하는, 지지하는 이념의 문제를 가지고 아주 뜨거운 논쟁이 촉발될 수 있는 그러한 세계입니다.


이동철 사이버 세계도 결국은 인간의 세계며 거기서 부딪히는 문제는 서구식으로 이야기하면 플라톤의 공화국 이래의 문제, 또는 동양에서는 공자, 맹자이래 치란(治亂)의 문제가 아닌가 합니다. 다시말해 인간사회의 질서 문제, 즉 모여 산다는 게 어떤 거냐고 하는 게 철학 내지는 사회과학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인데, 그런 고민하고 사실 매우 밀접한 것 듯합니다.


김현 결국 우리가 이 사이버의 세계, 가상 세계라고 하는 말을 잘못 이해하기가 쉬운데 실제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세계라는 이야기이죠. 하지만 그 가상 세계라고 하는 것의 궁극적 목표는 현실에서의 어떤 공효(功效)를 이루기 위한 것이지 가상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컨대 가상 백화점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거기에 가게 되면 7-8층짜리 백화점 모양을 화면 속에 재현하고 그 다음에 1층 잡화에서부터 2층 여성 의복, 3층 남성 의복, 4층 문화용품 이런 식으로 층을 선택해서 들어가게 되면 각각 점포가 있고 점포에서 애니메이션으로 구현된 여러 가지 상품들을 구경하면서 상품을 구매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실제적으로 이런 백화점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이것을 가상 백화점이라고 할 수 있죠. 하지만 그 가상 백화점에 들어가서 마지막으로 하는 행위, 어떤 상품을 선택해서 구매를 하는 것, 그러면 자신의 크레디트 카드의 번호를 물어보고 거기서 돈이 빠져 나가고 그 물건이 배달되는 것, 이것은 결코 가상 세계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에 이루어지는 현실 세계에서의 결과를, 일을 좀더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서 가상 세계를 구축해서 그것을 운영하는 것이지, 그냥 쇼핑을 하는 하나의 쇼핑 게임을 위해서 이 가상 세계를 마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이런 점에서 이 사이버의 세계는 앞으로 점점 더 그 현실적인 공효성(功效性) 때문에 그 영향력이 확대될 것입니다. 더 이상 가상 세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 현실 세계가 이 가상 세계와 하나로 합쳐진다는 것이고, 현실 세계의 모든 낭비적인 비능률을 제거하는 데 우리는 가상 세계에 의존하게 될 것이죠. 그때 방금, 먼저 말씀드렸던 가상 세계를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에 대한 많은 갈등적인 이념 문제들은 사실상 플라톤이라든가 공맹(孔孟)이래로 끊임없이 철학자들이 문제로 제기해 왔던 통제와 자율은 어디에서 합일점을 찾을 것인가 하는 것이 그대로 사이버 세계에서 활발하게 논의의 주제가 되고 있죠.


이동철 여태까지 인류의 역사라고 하는 것이 통제냐, 자율이냐 또는 자유냐 이렇게 나누었을 때 그것이 플라톤의 철인왕이건 공자의 대동세계(大同世界)나 노자의 소국과민(小國寡民)이건 그건 어디까지나 책에 쓰여진 개인적인 주장으로 그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현실화되었던 적은 사실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가상 세계에서는 거꾸로 가상적이지만 그러한 것이 극단적으로 실현될 가능성이 더 높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보면 유토피아냐 디스토피아냐 하는 것의 실현가능성이 더 클 터인데, 그렇다면 이제까지는 철학과 현실이 줄곧 괴리되었지만 이제 가상 세계의 쟁점과 관련해 어떤 철학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현실 세계에도 커다란 영향을 줄 것 같습니다.


김현 바로 그렇습니다. 자유주의자들이 그렇게 사이버 데모크라시를 확립하고자, 쟁취하고자 열을 올리는 것은 바로 거기서는 그 실현이 가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실 세계에서는 많은 걸림돌이 있죠. 유사 이래 이와 관련된 여러 가지 지적 실험은 대부분 좌절을 겪었습니다만, 이 사이버의 세계에서는 전혀 새로운 세계이기 때문에 그런 유토피아의 실현이 가능하고 그것은 가상 세계에서의 이상 속에서 실현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곧 우리 현실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것입니다. 현실 세계에서는 그러한 자유주의적인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는 노력이 실패했더라도 거꾸로 사이버의 세계에서 그 세계를 실현하고 그 사이버의 세계가 현실 세계에 큰 영향력을 미치게 함으로써 유토피아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는 이상을 가지고 사이버 데모크라시의 활동에 그토록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죠.


이동철 하지만 유토피아의 도래는, 뒤집어서 이야기하면 디스토피아의 도래가 될 수 있으니까 그만큼 우리가 더 진지하고 치열하게 고민해야 하겠죠.


김현 그 반대적인 입장에 서는 사람들, 예컨대 사이버의 세계를 이렇게 방종적으로 둬서는 안되고 어떤 통제가 있어야 보는 사람들은 달리 생각합니다. 또한 기업가의 입장에서는 이것의 미래를 단지 빈한한 대중 문화 차원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좀더 수준 높은 문화로 만들어야 한다. 그렇기 위해서는 자본가들이 자본을 투여하여 사이트의 기술 수준을 높여주고 그리고 자기네들이 보상을 받아야 된다고 하는 논리를 전개하는 것이죠.


이동철 당신의 생각이나 느낌과 거리가 있을지는 모릅니다만, 저로서는 한편으로 한문의 세계 내지 그것으로 대변되는 고전의 세계, 동양학의 세계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컴퓨터라든가 뉴미디어로 대변되는 뭔가 새로운 가능성으로서의 미래적인 것이 있다고 할 때, 현재라는 것은 사실 그 사이에서 찾아야 한다는 메시지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당장의 입장에서는 이익이나 편견이 커다란 영향을 미칠 수 있으니까요. 그런 가운데 자주 논의되는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의 위기를 극복하는 길을 찾을 수도 있다고 보입니다.


이동철 이런 문제와 관련해서 본인의 입장이나 위상 혹은 스스로 생각하는 역할은 어떤 것입니까? 크게 보면 현재 또는 미래 지성인의 한 모습이랄까 추구해야 할 하나의 역할과 관련시켜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현 사이버 세계의 정보 문화를 이끌어 나가는 것은 물론 한 개인의 능력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며, 많은 사람이 나름대로 자기 분야에서 역할을 해야될 것입니다. 그 가운데 아주 작은 한 가지 역할을 제가 자임하고 싶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사이버 세계의 네티즌들에게 전통 문화의 힘 또는 전통 문화를 이해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자율적인 힘이랄까 그런 힘을 얻는 기회를 제공하는 역할입니다. 이것은 제가 우리 고전의 전산화, 문화 정보의 전산화라고 하는 데 종사하는 역할이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먼저도 말씀드렸습니다만 결국은 동서의 철학적 문제가 그러했고 오늘날 사이버 세계에서 논의되고 있는 모든 논쟁들이 그러하듯이 자유와 통제, 어떠한 것을 위주로 해야 할 것인가 하는 그러한 논의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이버 세계라는 것은 현실 세계보다도 훨씬 더 통제가 어려운 사회입니다. 결국 이 사회에서는 모든 정보 사회의 시민들이 자율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그런 성숙된 문화 의식과 자율적인 능력을 가짐으로써만, 카피라이트와 카피레프트의 문제, 통제와 자율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것이죠. 또 그것은 네티즌들이 우리가 현실 세계에서 꾸준히 이러한 실험을 하고 시행 착오를 겪으면서 꾸준히 궁극의 답안을 찾기 위해 노력해 왔던 그런 인문학적인 메시지와 그 경험을 접함으로써, 그것을 교양으로 접함으로써 그 정보의 세계에서 방종하지 않고 남용하지 않고 조화로운 사회를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동철 동아시아의 전통사회에서는 질서의 문제에서 예치(禮治)냐 법치(法治)냐 하는 쟁점이 상당히 중요했습니다. 동아시아 문명의 큰 주류로서의 유교는 예치에 의해야지 법적인 통제에는 어떤 한계가 있다고 보았거든요. 김현 씨의 이야기를 들으니 한국 사상 내지 한국 철학이라는 본인의 맥락과도 상당히 닿아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아까도 임성주(任聖周)의 생의(生意)를 가지고 석사 논문으로 다루었다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만, 이제 박사 논문에 대해서 그리고 철학 연구자로서 본인의 문제의식에 대해서 이야기를 듣죠.


김현 사실상 제가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데이터베이스를 개발하면서 나름대로 그것이 정보 세계의 미래와 관련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제가 철학을, 한국 철학을 공부하면서 가져왔던 경험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저는 임성주라고 하는 조선 후기 성리학자의 철학 사상을 연구하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그 내용을 담은 책을 간행한 적이 있습니다만……


이동철 한길사에서 신한국사상시리즈의 하나로 나왔던 임성주의 생의철학인가요?


김현 예. 임성주라고 하는 철학자는 조선 성리학의 발전 과정에서 하나의 귀결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철학을 통해서 한국 성리학이 어떠한 궤도를 거쳐서 발전해 왔는지, 그리고 궁극적으로 도달하려 했던 바는 무엇인지를 연구하면서 제가 파악한 점이 있다고 한다면 이것도 역시 통제와 자율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 두 가지를 이원적으로 이해하는 과정을 거쳐서 하나로 합일시키는 단계로의 이행하는 것, 이것이 조선 성리학의 거시적인 발전사적 궤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잘 알다시피 주자학이라는 것은 리기 이원론을 표방했습니다. 그때 리가 인간의 도덕적 이상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기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몸담고 있는 현실 세계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리기 이원론이라는 것은 이상 세계와 현실 세계에 어느 정도 거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인정하는 데에서 출발하는 것이죠. 사실상 이러한 시각의 원류는 선진 시대의 맹자(孟子)와 순자(荀子)의 사상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인간의 이상적인 측면을 간파하고 그것을 인간의 본성으로 삼고자 했던 맹자의 시각, 그리고 인간이 현실적으로는 악에 빠지기 쉽다고 하는 면을 본 순자의 사상, 이 두 가지의 큰 주류가 있었습니다. 이 두 가지에 대해서 누구의 생각이 옳으냐 라고 묻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두 가지가 다 의미가 있다라고 하는 것도 크게 도움이 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 두 가지 생각은 각각 어느 한편이 더 진리로 인정되고 힘을 얻은 일종의 한시적 판정승이라고 그럴까요? 그러한 과정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정하게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힘을 얻어온 것이 아니라 그 힘을 얻은 강도라거나 어떤 것이 우위에 서고 어떤 것이 밑에 있느냐 하는 순위가 역사에 따라서 바뀌어 왔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보기에 큰 줄거리는 중국의 한나라 시대에서는 순자가 제시한 통제의 논리가 훨씬 더 우세했습니다. 그러다가 불교가 전파되어 영향을 끼치고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수당(隋唐)을 거치면서 이상 세계의 존재에 대해서 좀더 많은 가치를 부여하게 됩니다. 그리고 송대의 성리학(性理學)은 인간의 이상적인 면모를 현실 세계, 선악이 상존하는 현실 세계보다도 더 우위에 두고자 하는 그러한 노력이 결실을 거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당시의 송대 성리학에서나 그로부터 몇 백년 지난 조선 사회에서 성리학을 받아들였을 초기에는 인간의 이상적인 도덕성이 완전히 현실을 이끌어 갈 수 있다고 하는 그런 자신감에는 도달하지 못했었죠. 그렇기 때문에 이상과 현실에 어느 정도 거리를 띄어 두고 그리고 사람들한테 그 이상을 현실 속으로 끌어들이도록 아주 강력한 도덕적 의무를 부과했던 것입니다.


이동철 일종의 외압일 수도 있고 교육이나 의무 때문일 수도 있겠죠.


김현 조선 시대 선비들의 생활을 보게 되면 오늘날 너무나 경탄스러울 정도로 금욕적인 생활을 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데 그것은 이론적으로 이상과 현실의 거리를 한껏 벌려놓은 다음에 그것을 극기의 노력으로 그 이상과 현실을 하나로 합치기를 요구했기 때문에 그러한 절제된 생활, 욕구를 버리고 도덕적인 삶을 추구하는 생활을 하기를 강요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리기 이원론이라는 것은 결국 이러한 이성적인 면과 현실적인 면을 이원적으로 파악을 했다는 점과 함께 그것을 이 성향에서 리기가 완전히 독립된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로 합일되어야 하는 것을 강조한 것은 현실 속에서 이상이 실현되어야 함을 당위적으로 역설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리기 이원론의 주자학이 조선 시대에서는 조선 후기로 가게 되면 일원론 적인 색채를 아주 강하게 띠게 된다는 것이죠.


이동철 일원론이라고 해도 예컨대 리의 방향으로도 기의 방향으로도 그 일원화가 가능할 텐데 어떤 식으로 전개됩니까?


김현 우리가 택한 것은 리의 방향으로서의 일원론을 이루고자 하는 것입니다. 조선조의 성리학에서 택한 것은 퇴계 이황과 같은 사람은 그러한 이기가 이원적으로 분리되어서는 안된다라고 하는 철학을 하고 리에 대해서 좀더 강력한 의미를 부여하고 힘을 부여함으로써 리 위주의 통일을 지향했었습니다. 반면에 율곡과 같은 이는 리를 기 속에 끌어들임으로써 기가 리와 일치되도록 만드는 그러한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리기가 합일되도록 해야 된다는 이론을 역설했죠. 말하자면 퇴계의 주리론과 율곡의 주기론의 차이점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결국 그들이 목표로 했던 것은 리기가 합일되어야 한다라고 하는 그런 당위를 제시한 것에 대해서는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그 뒤에 이루어진 조선 성리학의 발전의 역사는 그 리기를 합일된 것으로 이해하는 단계로 도달하기 위한 노력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임성주 같은 사람은 기 일원론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언뜻 보아서는 기 위주의 통일 지향이라고 볼 수가 있지만 그의 기라고 하는 것은 완전히 도덕적 순수성을 이룩한 기, 즉 리화(理化)된 기입니다. 때문에 그는 성리학에서 역동성이 전혀 없는 것으로 하나의 이상적 목표로만 이해되었던 그 리에 기의 역동성, 즉 현실을 지배하고 이끌 수 있는 능력을 같이 부여해서 그 리기가 합일된 기를 이야기한 것이죠.


이동철 아까 말씀하신 그 생의의 개념하고도 연관이 있겠지요


김현 그렇죠. 이러한 역동성을 지닌 도덕적 이상이 하나의 차가운 이상적 목표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활발하게 우리 인간의 삶과 사회를 이끌어 갈 수 있는 역동성을 함께 지녔다는 의미에서 그러한 리기 합일체를 생의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죠.


이동철 이 생의란 개개의 인간이나 인류 전체에게도 있겠지만 나아가 천지의 전체 질서 속에도 있고 오히려 천지의 질서 자체도 생의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까?


김현  그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겠죠. 하지만 실은 그것은 인간의 마음, 심(心)을 투영한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임성주는 기 이론이라고 하지만 좀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그것을 심 이론이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겠죠. 성리학에서 전통적으로 심이라고 하는 것이 리기가 모여서 이루어진 것, 이기의 합일체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주자(朱子)의 성리학에서는 그건 이차적인 것이었습니다. 리기가 먼저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그것이 현상의 세계에서 함께 있게 된 것, 그래서 인간의 주체가 되는 것이 심이죠.


이동철 그것은 성리학에서 흔히 심통성정(心統性情), 다시 말해 심이라는 것은 리로서의 성과 기로서의 정을 함께 통괄한다고 할 때의 그런 맥락에서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김현 그렇습니다. 그런데 임성주 같은 경우에는 리기가 합일된, 즉 인간의 이상적인 목표와 현실적인 존재가 합일된 이 심이라는 것이 오히려 더 근본적인 존재라고 생각하며 그의 철학을 주창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원론화의 성향은 임성주 개인에게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고 그와 계파를 달리 하는 다른 성리학자들에게서도 정도 차이는 있습니다만 유사하게 성보다는 심 위주의 철학으로 이행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동철 일종의 양명학화, 심학화라고 할 수 있겠군요


김현 예. 그렇게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주자학과 양명학과의 차이라면, 주자학은 인간의 본질을 성(性)으로 이해하는 데 이 성은 인간의 이상적인 주체성입니다. 현실적으로 인간이 어떠한 존재이냐를 논하기 이전에 본질적으로 인간은 우주적으로 순수한 이상적 원리를 품부(稟賦)받았다, 그것이 인간의 본질이다, 그런 측면에서 파악한 것이 인간의 성이라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심이라는 것은 구체적인 인간의 역동적인 주재력입니다. 양명학은 심이 바로 인간의 본질이다, 그리고 인간의 본질일 뿐만 아니라 그 심이 바로 우주의 보편 원리이다, 역으로 이야기를 하죠. 대개 주자학에서는 성즉리(性卽理)를 대표적인 명제로 하고 양명학에서는 심즉리(心卽理)를 대표적인 명제로 삼습니다. 그런데 이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 주어와 술어의 구조에 차이가 있습니다. 주자학에서는 성이란 우주의 보편적인 원리인 리에서부터 구현된 것이다, 해서 리가 더 본연적인 것이고 성은 그것이 인간에게 부여된 것으로서 이차적인 것입니다. 이에 반해 양명학의 심즉리라는 것은 인간의 주체성, 현실적인 주체성인 심이 우주의 보편원리를 이룬다고 해서 심이 먼저 오고 리가 나중이라는 것이죠.


이동철 오히려 심에 의해서 리가 나온다. 똑같은 즉(卽), 같은 등호(等號)라도 그 관계가 다르다 하는 이야기군요.


김현 예. 흔히들 조선시대의 유학에는 양명학적 전통이 없다거나 미미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주자의 성리학이 교조적인 성격을 띠었기 때문에 양명학이 이단으로 간주되었고 그것을 공부하는 연구자들이 불과 아주 극소수였던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상과 현실을 하나로 묶어서 인간 스스로의 현실적인 도덕적 자율 능력을 인정해야 된다는 것이 조선 성리학 발전의 궁극적인 목표였기 때문에 조선 성리학은 성리학 자체가 바로 그러한 심학화 경향을 띠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이동철 이전에는 임성주의 철학은 기의 철학이라고 말하면서 그 기를 일종의 유물론적인 것으로 이해해 온 경향도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예컨대 북한의 철학사 서술사는 물질적인 기는 가치가 있고 좋은 것이라는 전제와 주리론=관념론, 주기론=유물론이라는 피상적이고 단순한 도식에 의해 조선 철학사 내지 유학사를 주기론과 주리론의 투쟁으로 재단합니다. 임성주의 철학에는 기라는 용어가 많이 나오고 기에 의해서 모든 것을 설명하니까, 그의 철학은 유물론이며 일종의 근대적 사상가라고 파악합니다. 그리고 이후 「기학(氣學)」과 같은 최한기(崔漢綺)의 철학에도 연결시키도 합니다. 이런 해석은 암암리에 남쪽 학계에도 영향을 주었던 것이죠. 더구나 이런 유물론이라거나 기철학의 흐름은 우리에게도 서구적 의미의 근대성이 있다고 해석되어 오기도 했습니다. 이점은 철학 연구자만이 아니라 문학 비평가들에게도 주목되기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신의 입장은 이와 다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자세히 이야기를 듣고 싶군요.


김현  당신도 잘 아시겠습니다만 먼저 임성주 철학은 최한기의 철학과 맥이 좀 다릅니다.

또한 임성주의 철학이 조선후기 성리학의 발전에서 정점에 있다고 할 때 흔히들 근대적 의미에서의 정점이라고 보며 여기서 근대성의 출발점과 연결시키고자 시도합니다. 하지만 임성주의 생의철학은 서구적 의미에서 근대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고유한 근대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상사적으로 말해도 그게 정점이 아니라 오히려 그 정점을 향한 노력이며 오늘날 우리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그 맥락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동철 일본의 경우 예컨대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는 주자학에서 탈피하여 그와 전혀 다른 일본의 근대성이라는 것을 자연(自然)과 작위(作爲)의 구분이라는 도석으로 제시하였습니다. 하지만 평소 당신과 대화를 나누면서 제가 느낀 것은 우리의 근대성은 오히려 주자학 내부 안에서의 발전, 다시말해 자연과 작위의 엄밀한 구분이 아니라 예컨대 기와 리의 합일같은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러한 흐름에서 새로운 인간상을 제시할 수 있으며, 이는 좀더 적극적으로 표현한다면 조선문명이 인류에게 제시할 수 있는 정신적 유산의 하나이며 따라서 기술문명의 발달로 실현가능한 다시말해 네티즌의 세계를 통해 실현될 수 있는 새로운 세계에 기여할 수 있는 인간상의 한 모습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만...


김현 이 점이 사실상 어떻게 보게 되면 제가 해온 연구의 가장 논쟁적인 부분이 있겠는데요, 일본의 근대 역사를 그러한 근대성 추구의 역사로 그렇게 한 데는 사실상 마루야마의 노력이 큰 역할을 했었죠. 그의 저작을 국내에 많이 번역한 김석근씨와 자주 토론도 많이 하면서 여러 가지로 이야기도 나눈 적도 있습니다. 사실 마루야마는 일본 사회에서 이루어진 근대성 추구의 역사를 주자학으로부터의 탈피에서, 다시말해 주자학이 추구하는 이상 세계의 허구성에 몰입하지 않고 반대로 현실성을 추구해 나갔던 일본 고학파(古學派)들의 노력에서 찾았던 것이지요.


이동철 예를 들어 정치에서도 리얼폴리틱(Realpolitik)의 요소를 찾아내어 이를 통해서 새로운 정치적 질서를 발견하고 여기서 근대성을 찾은 거죠.


김현 그러한 구상을 사실 마루야마가 했었고, 그 구상에 의해서 그것이 바로 근대화의 모델처럼 간주되어 왔습니다. 어떤 면에서 서구에서 추구하는 근대화의 노력과 일치하는 면이 있었던 것이죠. 마루야마가 그 모델에 맞추어 일본의 근대성을 서술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일본의 역사에서 상당한 타당성을 가질 수 있는 것도 사실이죠. 그런데 암암리에 그러한 식으로 근대성을 규정하면서 조선 사회에서 이루어진 근대화도 그러한 궤적을 재현한 것으로 볼려고 했던 시각이 오랫동안 우리 학계에도 있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말하자면 일제의 식민지배를 거치고 난 후에 우리도 나름대로 근대성 추구의 노력이 있었다는 시각에서 거기에 일치되는 모델을 정립하려고 노력했었던 것이지요. 한국학의 여러 연구 분야에서도 특히 실학 연구가 집중적으로 추구되었던 것도 아마도 그런 이유에 근거하지 않나 생각됩니다. 하지만 조선 후기의 역사가 실제적으로 보여 주는 것은 그와는 다른 면이 있지 않나 생각되거든요. 이상 세계를 추구하는 그러한 노력의 허구성을 떠나서 현실 세계에서 유효하고 가치있는 것을 추구하는 노력이 조선 후기 사회에서 활발히 전개된다기 보다도 그때의 지식인들에게 사실상 가장 중요한 문제의식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 이상과 현실을 일치시켜 나가느냐 도덕적 주체성을 확립시키느냐 그러한 문제였다고 보여집니다. 그것은 소위 우리가 실학자로 지칭하는 사람들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생각이 됩니다. 사실 북학자들의 경우에는 중국에 가서 서구에서 들어온 여러 문물들을 접하고 그러한 문물들을 수용할 것을 건의한 면에서 다른 성리학자들이나 실학자들과의 차이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실학자들이 목표로 했던 것은 이른바 주자학에서 추구했던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이 구현되는, 왜곡되지 않고 실현되는 그러한 사회였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실학자들이 목소리를 높여서 비판했던 것은 그러한 이상적인 사회를 이룩하는 데 방해가 되는 여러 사회적인 부조리들이였죠. 주자학의 이념 자체, 그런 윤리적 이상 사회를 구현한다는 이념 자체에 이의를 제기했던 것은 결코 아니죠.


이동철 사실 제 전공이 아니라서 상당히 막연하게 느낌입니다만, 한국 철학사나 유학사에서 조선 후기의 성리학과 실학은 전혀 별개인 양 설정하면서 아무런 문제의식도 공유하지 않은 것처럼 서술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인상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물론 비전공자로서의 언급입니다. 하지만 당신의 이야기는 양자가 주자학의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노력한 결과라는 주장으로 들리거든요. 그랬을 때 어쩌면 이는 인문주의적 접근이냐 사회과학적인 접근이냐의 차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인간성의 개선이 중요한가 아니면 제도의 개혁이 중요한가 하는 의견 차이도 결국 같은 문제의식에서 나온 것이겠죠. 그런데도 여태까지는 자꾸 실학만이 기존의 근대성 모델하고 쉽게 매치된다는 과점에서 어떻게 보면 일방적으로 강조돼 온 반면 후기 성리학이 지니는 우리 고유의 근대성이랄까 그런 면은 간과되지 않았나 합니다.


김현 인간의 본질을 새롭게 규정함으로써 이상과 현실의 합일을 추구하려고 했던 것, 그것을 입증하려고 했던 것이 성리학자들의 노력이라면 제도론적으로 이상 사회의 실현을 가로막는 부조리한 것들을 개선함으로써 현실 속에서 이상이 실현되기를 추구했던 것이 실학자들의 노력이었다고 할 수 있겠죠. 그리고 그들의 목표는 궁극적으로 유사한 것이 아니었나 합니다. 주자학에서 말하는 인간의 도덕적 본성을 현실 속에서 주체적으로 사회를 이끌어 가는 그러한 사회의 실현이었다고 할 수가 있죠.


이동철 사실 중국에서 보면 주자학 이후 명대에는 잘 알다시피 양명학이 나타나고 그것이 발전해서 이탁오(李卓吾) 같은 사람은 “옷을 입고 밥을 먹는 것(穿衣吃飯)이 바로 인륜(人倫)이고 물리(物理)”라는 다시 말해 일상 생활 자체가 윤리라든지 질서라는 것조차 상당히 강하게 주장합니다. 이처럼 서구의 근대적인 인간상과 상응하는 면이 매우 뚜렷하게 나오니까 그런 근대성을 쉽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주자학이라는 것 자체를 볼 때마다 느끼지만 주자학 이전의 세계는 모두 다 주자학 안에 있고 그 이후의 모든 발전 가능성도 주자학 안에 다 들어 있어요. 양명학 내지는 심학 그리고 고증학도 이미 주자학 안에 그 요소가 있는데, 중국의 경우는 이것이 명대의 양명학, 청대의 고증학으로 시대에 따라 뚜렷하게 나타나니까 발전이랄까 전개의 맥을 잡기 쉬운 편입니다. 그에 비해 한국 유학사의 역사라는 것은 주자학의 틀 안에서 내부적으로 그 방향성을 새로 정립해 나갔으며, 따라서 중국처럼 뚜렷하지는 않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이와 관련해 당신의 주장은 그 흐름이 종래 언급되었던 것처럼 서구적인 근대성의 방향이 아니며, 녹문 임성주의 근대성도 기라는 용어와 연관시켜 흔히 말했던 유물론적인 의미의 근대성이 아니라 새롭게 정의되고 파악된 근대성의 맥락에서 오히려 더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는 있다. 이런 방향으로도 이해할 수 있나요?


김현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사실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조선 후기에는 그런 근대성 추구의 노력이 없었느냐 하는 오해스러운 질문으로 반박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인데요. 다만 우리가 근대화의 모델이라고 하는 것을 서구에서 산업 혁명을 통해서 이룩한 그러한 근대성으로 규정하는 한 그 질문에 대해서 만족할 만한 답을 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동철 사실 실학이라고 해도 거기에 대한 만족스러운 답변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됩니다만....


김현 하지만 성리학이 초기에 인간의 현실 세계와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것으로밖에는 인정할 수 없었던 그러한 이상적인 목표에 대해 현실 속의 인간이 실질적이고 역동적인 주재가 될 수 있다는 자각에 도달했다면, 그것은 그만큼 인간의 주체적 지위를 높인 것이고 또한 그것은 나름대로 우리가 충분히 그 목표에 대해 노력을 기울일 가치가 있는, 나름대로의 근대성 추구였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되고요. 그리고 오늘날에도 제대로 그것이 실현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는 목표라고 생각합니다.


이동철 아마도 한국의 지식인론을 쓴다면 그러한 지성사적 맥락에 대한 검토가 분명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다소 거칠게 말하면 조선 성리학의 근대성(?)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삶의 세계를 바꿀 수 있는 기회나 과정이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등에 단절되는 바람에 이상과 현실의 일치라는 과제가 해결되지 않고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는 것이겠지요.


김현 그렇죠. 하지만 극복하기 위해서는 문제의 병중(病症)을 올바로 알아야 합니다. 흔히 정신병은 병의 원인이 잠재의식 속에 있어서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치유가 힘든 것이거든요. 그 원인을 직시한다면 극복이 가능하지 않나 생각이 되요. 그것이 우리가 전통 철학을 하는 이유이기도 하죠.


이동철 당신은 종종 “우리는 아직 조선 시대에 살고 있다”고 진지하게 말하곤 합니다. 전통적인 역사관에 의하면 한 왕조가 끝났을 경우에는 반드시 기전체(紀傳體) 형식의 정사(正史)로서 그 역사를 정리하게 됩니다. 따라서 조선 왕조가 들어서면서 이전의 실록이나 여러 사료를 기반으로 「고려사(高麗史)」를 편찬하였습니다. 반면 우리는 아직도 조선의 문화, 정치, 사회, 각 인물에 대한 평가 등 이런 것들을 “조선사(朝鮮史)”로서 정리하질 못했거든요. 중국의 경우 중화민국(中華民國)이 성립된 이후에도 전통적인 역사 서술 방식에 의한 「청사고(淸史稿)」를 통해 청대의 역사를 정리했습니다. 조선 총독부 산하에 조선사 편수위원회라는 것이 있었습니다만 우리 주체에 의해서 한 것은 아니니까 그런 면하고도 상당히 거리가 있었죠. 물론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이라는 방대한 사료를 번역하고 전산화한 것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일이긴 합니다만. 


김현 이제는 우리가 그 일을 해야 됩니다. 단지 실록을 사료로 한 정사의 편찬을 넘어서 조선 시대를 정리해야겠죠. 당시 우리가 도달하려고 했지만 아직까지 도달하지 못한 채 남겨진 숙제, 즉 조선 후기 지식인들의 지적 세계에서는 이상적 도덕적 주체성을 현실적 주체성과 일치시켜야 한다는 자각까지 도달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사회화되지 못했죠. 가장 앞서 가는 지식인들의 머리 속에서만 그 새로운 세계가 설계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이야기한 대로 우리는 그것을 사회화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했죠. 일본의 식민 지배와 그 뒤 물밀 듯 밀려온 서구 문화의 홍수 속에서..... 그렇다고 해서 저절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그 숙제를 안고 있는데 제 생각에 이것은 잊혀져서 될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해서라도 풀어야지 그 다음 단계로 이행을 하는 것입니다. 그 문제를 잠재의식 속에 여전히 안고 있는 한, 우리는 계속 그 병증에서 벗어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동철 아마도 당신이 했던 실록의 CD롬화 작업과도 관련이 있으리라 생각되는데, 최근 여러 가지로 조선 시대에 대한 관심이 상당히 늘었다고 하겠습니다. 찬반을 떠나 조선 시대나 그 문화에 대한 관심이 현상으로서 존재하는데 그 원인은 복합적일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원인 당사자의 한 사람이라고 할까요 적어도 전공하는 한 사람의 연구자로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김현 출판계에서도 조선 시대 신드롬이라고 해서 조선 시대에 주제를 맞춘 책들이 많이 나오고 읽히며 또 최근에는 KBS에서 TV 조선왕조실록이라고 해서 조선왕조실록을 주제로 한 프로그램을 저녁 9시 뉴스 이후 골든아워에 나오고 있습니다. “용의 눈물”이란 드라마도 상당히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TV실록 같은 경우 직접 CD-ROM을 검색하면서 다큐멘터리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조선 시대 신드롬이 일어나는 이유는 우리가 한동안 몰랐던 우리 옛 문화의 가치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라기보다도 오히려 오늘날 우리의 사회 제반 모습과 조선 시대와의 연계성, 그 연속성에 눈을 뜨기 시작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동철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예를 들어서 최근에 터지는 한보 청문회나 김현철 사건, 이런 것만 해도 어떤 면에서 왕조적인 정치 형태 연속성에서 나온다고 볼 수 있겠지요


김현 물론 구체적으로 여러 가지 역사 사실을 비교해 가면서 이야기할 수도 있겠습니다. 단적인 예로 저는 강의 시간에 학생들한테 400권이 넘는 조선왕조실록을 책으로 읽어보라고 그동안 과제로 줄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CD-ROM이 나오고 거기서 여러 자료들을 뽑아서 많은 단행본들이 만들어지고 TV프로까지 만들어지고 하니까 이제는 학생들한테 그런 책을 읽어라, 그리고 조선 시대에 대해서 너희들이 이해한 바를 써내라, 이러한 과제를 주기에 훨씬 편해졌습니다. 학생들의 보고서를 보게 되면 우리의  전통 문화 유산에 대한 관심만이 아니라 오늘날 사회의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여러 면들이 조선 시대부터 있어 왔다는 사실, 다시 그들의 삶이 오늘날 우리들 삶의 원류를 이룬다는 것을 상당히 흥미롭게 보고 그 점을 언급하는 반응이 참 많아요.

이처럼 조선을 우리들 앞에 시간적으로 선행하며 역사적으로 사라져 버린 시대로만 보지 않고,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많은 면에서 우리 사이에 여전히 살아 있는 것으로 본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거듭하는 말이지만 그래야 치유를 할 수 있습니다. 병의 원인이 문화의 원류에 있고 앞선 그 시대에 있는데 이를 도외시하고 현상적인 것에만 주목해서 해결 방법을 찾고자 하면 답이 안나오죠.


이동철 사실 전통 문화나 전통 철학의 연구자 중 한 극단에는 동양의 전통적 윤리나 철학이 현대의 여러 문제점에 대해 만병통치약인양 강하게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고 다른 한 극단에는 박물관의 유물처럼 현대적 의의는 없지만 마치 시체를 부검하듯 철저히 연구하고 파괴해서 그 병폐를 없애야 한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조선 시대 신드롬에 대해서 이를 주체성의 회복으로 이해하는 사람도 있고 반면에 상업주의나 매스컴의 농간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양쪽이 모두 일면적이고 극단적인 주장들입니다. 어쨌거나 이런 쟁점은 고전(古典)과 현대(現代)의 관계도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고전도 역시 현대와 연결되어야 할 것이고, 현대도 끊임없이 고전에 의해 반성되고 검토되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점에서 고전 연구와 밀접한 인문학의 역할이 매우 크다고 보이는데.....


김현 이제 우리 인문학쪽에서도 교통정리를 해주어야 됩니다. 그 동안 고전이 전공자들에게만 폐쇄적으로 독점되어 왔죠. 독점하고 싶어서 독점한 것이 아니라 학자들의 노력만으로는 결코 그 폐쇄성을 열어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문학계라든가 방송 매체, 이런 데에서 우리의 문화적인 뿌리들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이런 데이터베이스가 CD-ROM으로, 온라인으로 사이버 시티에서 오픈되어서 사이버 세계에 탐닉하는 젊은 세대들이 그 정보를 자유롭게 접하는 가운데 우리 문화에 대한 기본적인 소양을 갖추게 될 때 인문학자들이 그런 토대 위에서 방향을 잡아 주는 것이죠. 이것이 문제였고, 이것이 가치 있는 것이었고, 우리가 추구해 온 그 어떤 것이었는데 도달하지 못한 것이 무엇이었다. 이런 점들을 분명히 알아들을 수 있는 이해 기반이 어느 정도 조성된 데에서 이야기를 해야지 그것이 먹혀 들어갈 기본적인 토대가 없다면, 예컨대 초등학생들을 모아 놓고 대학 수준의 강의를 한 것 아닙니까?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이런 신드럼을 학문의 진면목하고 다른 통속적인 흐름이라고 경계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바탕으로 깔린 다음 올바른 지식, 올바른 방향 궤도가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제가 생각하는 중요한 요인은 그래야만 인문학, 특히 전통 문화에 대한 연구를 이어 나갈 수 있는 후학이 계속 조달됩니다. 후학들을 재생산하는데 그 분야는 학문적으로 빈사 상태로 빠지게 됩니다.


이동철현대사상」 창간호에서도 인문학의 위기에 대해 좌담회를 했지만, 인문학의 위기하고 근원적으로 같을 수 있지만 현상적으로 다른 것이 동양학의 위기랄까, 한국학의 위기입니다. 이런 위기는 지금 말씀하신 문제하고 상당히 밀접한 관련이 있지 않습니까? 이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 지요? 평소의 지론과 관계가 있을 것 같아 끝으로 묻는 것입니다.


김현 사실상 저는 이 대담의 적절한 인물이 아니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라고 하는 인물이 이러한 주제의 대담에 끼게 된 이유 중의 하나는 지식인이 되고자 노력했던 사람이 겪는, 패러다임이 바뀌는, 준거틀이 바뀌는 이 시대에 나름대로의 역할을 찾으려고 갈등하고 방황하는 하나의 샘플로서 추천된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만, 그런 의미에서 저는 사실상 하나의 모험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험은 어디까지나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거든요. 


이동철 정보화 시대의 한국 사상, 그 최전선에 선 젊은 지성의 모험, 오늘 대담의 제목을 이렇게 달고 싶기도 합니다.